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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 1주기]잡스와 애플

MB Brad KWON 2012. 10. 5. 09:00

잡스가 세상을 떠난지 벌써 1년이 지났다. 잡스가 남긴 유산 위에서 애플은 계속해서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을 이루고 있다. 물론 '혁신'이라는 평가는 더이상 받지는 못하지만 아직도 애플은 시장을 선도하는 기업으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글에서는 지금의 애플을 있게 만들고 인류의 삶을 윤택하게 만든 잡스의 생애에 대해 얘기를 하려고 한다. 물론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는 다룰 수 없다. 자서전과 영화, 위키백과를 통한 필자의 지식으로 채워 넣을 예정이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혹시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댓글을 남겨주기 바란다.

 

 잡스가 공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것은 그의 아버지가 '히스키트'라는 전자공학 키트를 선물하면서부터 이다. 잡스의 양아버지 '폴 라인홀트 잡스'는 기계공이었다. 잡스는 아버지를 따라 자연스럽게 기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아버지가 마련해준 차고의 한 구석의 작은 작업대에서 히스키트를 가지고 놀았다.


 잡스는 캘리포니아의 쿠퍼티노에서 학교를 다녔으며 그 당시, 쿠퍼티노와 팔로알토 주변(현재 '실리콘 벨리')은 스탠포드대학교를 중심으로 작은 IT회사들이 모여들던 시기였다. 물론 잡스도 팔로알토의 HP(휴렛-팩커드)에서 방과후 수업을 들으며 후에 동업을 하게 되는 스티브 워즈니악과 여름에 임시 채용으로 일하게 된다. 잡스는 이후에 리드대학교로 진학한다. 리드대학교에서 잡스는 디자인 수업을 듣게 되고 그 후, 글자와 모양 디자인에 관하여 관심을 갖게 된다. 애플의 디자인 철학은 이 때부터 시작 되었는지 모른다. 리드대학교를 중퇴한 잡스는 "즐기면서 일하는 곳"이라는 구인광고를 보고 '핑'이라는 게임을 만들어 승승장구하던 게임회사, 아타리에 취직해 일하게 된다. 이 때, 잡스는 취직할 때까지 로비에서 버티겠다고 고집부렸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후에 워즈니악의 권고로 홈부루 컴퓨터 클럽에 나가게 된다. 홈부르 컴퓨터 클럽은 팔로알토의 엔지니어들이 자신이 만든 컴퓨터와 기계를 들고와서 서로 보여주고 자랑하는 모임이었다. 이 클럽을 통해 잡스와 워즈니악은 애플1을 선보였다. 애플 1 발표 자리를 통해 컴퓨터 부품가게인 '바이트 샵'을 운영중인 '폴 테럴'을 만나게 된다. 폴 테럴을 통해 바이트 샵에 100대 납품 계약을 받게 된다.

 

 

애플1


 

 그 후, 차고에서 시작한 애플은 애플1의 성공에 힘입어 다음 제품을 준비한다. 차기 제품인 애플 2의 구상은 바이트샵에 애플1을 납품할 당시, 폴 테럴의 말이 시작이었다. 폴 테럴은 전문 엔지니어를 제외한 일반 사용자들은 전기 코드만 꼽으면 사용 가능한 기기를 원한다는 말을 했고, 잡스는 애플 2는 올인원(모든 부품이 조립된 완전체 형) PC의 형태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각 부품을 조립할 필요없이 전기만 공급하면 바로 사용 가능한 PC이다. 이를 기반으로 1979년 플라스틱의 외형의 애플2를 공개한다. 뒤이어 주식을 공개하고 잡스는 1980년 24살의 나이에 억만장자가 된다.



애플2



 더욱더 커지는 애플은 엔지니어가 아닌 전문 경영인이 필요하게 되었고 펩시의 부사장으로 있던 존 스컬리를 영입하게 된다. 여기서도 잡스가 존 스컬리에게 "평생 설탕물을 파시겠습니까? 저와 같이 세상을 바꾸시겠습니까?"라고 말한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잡스는 제록스의 PARC에서 마우스를 이용한 GUI(Graphic User Interface)를 보게 되고 제록스의 이사진은 쓸모없는 물건이라고 생각했는지 잡스에게 사용권을 주게 된다. 잡스는 당시 '빅브라더'로 불리던 거대 컴퓨터 회사 IBM의 대항마로 자신의 딸 이름을 딴 리사를 내 놓게 된다.

 

 

리사

 

 

 하지만 터무니 없이 비싼 가격으로 인하여 뛰어난 성능에도 불과하고 리사는 10년동안 10만대 밖에 팔지 못하는 부진을 면치 못한다. 결국 리사는 세금 문제로 인하여 전부 매립지에 파묻히게 된다. 리사의 실패 이후 잡스는 매킨토시 프로젝트를 수립하여 GUI기반의 컴퓨터 제작에 매진한다. 하지만 당시 명령어와 명령줄에 익숙해 있던 프로그래머들에게 GUI 프로그램은 커다란 도전 과제였고 이는 소프트웨어의 부재로 이어지게 되었다. 결국 매킨토시는 기존의 애플1의 차기 버전 애플2보다 적게 팔리면서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된다.

 

 

매킨토시


 또한 매킨토시의 내부를 비공개했기 때문에 IBM PC 호환기종들이 컴퓨터 시장을 장악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게 된다. 이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리사와 매킨토시의 연이은 실패와 잡스의 난폭한 성격으로 인해 잡스는 1985년 자신이 30살이 되던 해에 자신이 영입한 존 스컬리에 의해 경영에서 물러나게 된다. 

 

 애플에서 쫓겨난 잡스는 넥스트라는 회사를 세운다. 넥스트라는 회사는 세계 최초의 객체지향 운영체제인 '넥스트 스텝'을 개발했다. '넥스트 스텝'이라는 운영체제를 이용한 넥스트라는 컴퓨터도 개발했다. 하지만 넥스트 컴퓨터는 정사각형의 특이한 모양을 가지고 있었고 이 모양 때문에 기존의 컴퓨터 회로 대신에 특별 제작한 회로를 사용해야했다. 이는 넥스트컴퓨터의 단가를 올리는데 큰 작용을 했다. 또한 잡스는 당시에 가장 널리 쓰이던 플로피디스크 대신 광학 드라이브를 넣게 되는데 이 또한 판매 부진에 일조를 한다. 결국 1989년 잡스는 애플의 주식을 팔면서 투입한 천문학적인 개발비를 회수하지 못하고 억만장자에서 2500만달러의 자산가로 전락하고 만다.

 

 

넥스트 컴퓨터

 

 

 한편 잡스는 조지 루카스의 컴퓨터 그래픽 회사를 보고 매료된다. 결국 잡스는 컴퓨터 그래픽 회사를 인수하기에 이른다. 회사의 이름을 '픽사'로 바꾼다. 픽사의 가장 큰 업무는 의료용 기기에 사용되는 하드웨어의 생산이었다. 그리고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한 영상을 만드는 작은 부서로 이루어져있었다. 잡스는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한 영상을 제작하는 부서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 작은 부서는 15분의 단편 영화를 만들어 상을 받게 되고 잡스는 이 부서에 더욱 많은 투자를 하게된다. 결국 픽사는 1995년 토이스토리를 개봉하여 엄청난 수익을 창출한다. 픽사는 디즈니에 인수 합병이 되고 잡스는 디즈니의 이사진이 된다.

 

 반면, 애플은 잡스가 떠난 후에도 경영 부진이 지속됬다. 결국 1997년 애플은 넥스트를 인수하면서 잡스의 경영복귀가 가시화된다. 그 해 7월 잡스는 CEO로 복귀하게되고 10억달러의 적자를 내던 애플을 한해만에 4억달러의 흑자로 돌린다. 잡스는 매킨토시 프로젝트를 부활 시켜 1998년 아이맥을 공개한다. 그리고 넥스트에서 개발했던 '넥스트스텝'을 맥에 맞게 탈바꿈 함으로써 Mac이라는 새로운 운영체제를 개발한다. 1999년엔 아이북이라는 노트북을 공개했다. 이어 뮤직 플레이어인 아이팟을 만들었고 아이튠즈라는 음악시장을 개척하기도 한다. 애플은 데스크탑과 노트북 시장을 선도했다. 그리고 뮤직플레이어와 커다란 음악 유통시장까지 장악하기에 이른다.

 

 

1세대 아이맥


 잡스는 2007년 터치스크린 기반의 아이팟과 휴대전화, 모바일 인터넷을 결합시킨 아이폰을 공개한다. 이듬해에 3세대 통신망에 대응하는 아이폰 3G를 내놓는다. 그리고 SDK가 공개 되면서 아이폰 OS 2.0부터 애플의 앱스토어를 통해 자유롭게 앱을 만들고 판매할 수 있게 된다. 2009년 더 빠른 CPU와 아이폰 OS 3.0을 탑재한 아이폰 3GS를 공개한다. 2010년엔 자이로와 가속도계를 가지고 레티나 디스플레이를 채택한 아이폰 4를 공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아이폰 4는 지금 모든 스마트폰의 원형이 되었다. 2011년 잡스의 건강은 많이 악화되었다. 이미 2004년 췌장암 수술을 받은 이후로 우려되었던 일이었다. 결국 잡스는 2011년 Mac OS X Lion과 iOS5, 아이클라우드 기조연설을 끝으로 애플의 무대에서는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2011년 10월 5일 스티브 잡스는 췌장암 투병끝에 죽음을 맞이한다. 밑의 사진은 잡스의 유작이라며 'iPhone for Steve'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아이폰 4S이다.


아이폰 4S